Somang Church

제목: 상한 달대를 꺾지 아니하며

본문: 12:9-21

설교: 정희숙 목사

 

12: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2: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2: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2: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2: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2: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 인생은 쉼과 안식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진정한 쉼과 안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가 필요합니다. 왜냐면 안식의 완성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치유, 회복이죠. 무엇을 회복하는가? 사망으로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인생을, 그 인생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고, 그 길을 걸어갈 때 진정한 안식과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고 걷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주님께서 가신 길이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럼 십자가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길에서,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그 생명으로 인하여 기쁨이 충만한 길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그 삶을 보고 우리는 알아가는 것이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주님의 살아가신 그 삶을 보고 따라,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그 사랑을 알고 그 길을 갈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예언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12: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2: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2: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2: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그 분을 고난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붙드시는 종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으로, 하나님의 신으로 이방에 공의를 베풀 종으로, 온유와 겸손의 종으로, 긍휼과 자비의 종으로 그리고 심판의 종으로 이사야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며 내 마음에 기뻐하는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고난의 종으로 우리가 빌립보서를 통해 알 듯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태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그 십자가의 들림이 유대인만을 위한 구원의 길아니라. 온 세상에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것입니다. 구원의 메시야. 십자가의 사랑이 온 세상에 유대 땅을 넘어 이방에 복음을 증거하는 메시야입니다. 이방은 어떤 상태입니까? 이방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2:12)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받는 자와 받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권능의 치유사역을 보지 못했고, 천국 복음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것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은 이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파될것입니다.

 

12: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예수님이 회당에 가셨습니다. 회당과 성전이라는 것은 유대인의 두 정신적인 중심. 하나는 교육적이고 하나는 제사적인 것이죠. 회당은 교육적인 기능인가 하면 성전은 제사적인 기능을 하는 곳이죠. 이곳은 주인이 없는 곳입니다. 참 유대인은 위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당이라는 곳은 주인이 없고, 회당장이 있는데. 회당을 지키는 사람으로 회당을 지키고 관리하는 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자 하면 그곳에서 전할 수 있는 곳이 회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그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당 안에 있는 이 한쪽 마른 사람은 바로 유대교 자체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회당은 유대교를 상징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유대교가 그를 구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나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한 것이죠. 인간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길이든 가정이든. 회당이든 어디서든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 하며 유대교든. 불교든. 회교든 어떤 종교든그리스도의 구원은 필요한것입니다.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물어오는 매우 도전적인 질문이면서 함정이 있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질문을 들었다면 이런 질문을 할까? ‘ 당연히 고쳐야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기본 규정인데 그들 조상의 유전에 안식일일지라도 의사는 그 삶의 병을 치료할 수 있어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의 경우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오면 죽지 않을 정도 만큼만 치료하시오, 병이 더 악화되지 않을 정도만 치료하라는 세칙이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한쪽 손 마른자가 왔습니다. 생명이 위중한 병자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병을 치료하는 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로 여겼으며 출애굽기 352절에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그것은 곧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사형을 시키라는 율법에 근거하여 죽음의 함정을 마련해 놓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종교가 본질적 생명력을 잃었을 때 얼마나 사악하게 전락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것은 큰 도전입니다. 율법이냐? 자비냐? 제사냐? 인내냐? 무엇이 더 먼저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양의 생명의 귀중성에 이어 보다 큰 생명의 가치를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양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 하심으로 유대인들의 도전적인 질문을 침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인간을 위해서 만드신 것으로서 인간이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선한 율법이 생명의 위험을 방치할 수 없는 것이며 생명을 구하는 일이 안식일에 이뤄진다 해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행위입니까? 이 손은 무엇이냐. 이게 다른 손 같이 고쳐주신 것 입니다. 정말 불쌍한 자, 한쪽 손이 말라서 한쪽 손이 비틀어졌죠. 왜 그랫을까? 가난하고 먹지 못해서 돌아갔는지 모르죠. 노동을 해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에 있어서 한 쪽 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정말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것이죠. 심각한 문제죠. 그런데 그 마른 손을 다른 손처럼 고쳐주었다고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안식일의 원리를 말씀하시고 그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한쪽 손 마른 자의 손을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성전보다 더 크신 이안식일의 주인 되신 이의 신적 권위로 병자를 낫게 하심으로써 입증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따르게 된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진리 앞에 선입견 없이 빈 마음으로 선다는 것은 복있는 일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마음 속에서만아 예수는 그리스도로 보이며 그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무엇이 먼저인가 라는 것입니다. 율법보다 우선하는 율법보다 선행하는 하나님의 자비에 관하여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사랑이 드러난 자리에서 예수를 죽일까 의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법과 사랑의 이야기죠. 율법과 복음에 관하여, 율법과 사랑에 관하여, 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 것으로 하나님 말씀을 배운 자들은 그게 있음으로 진노의 하나님을 우리가 앎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알데 되는 것이죠. 심판의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죠. 그런데 우리ᅟᅡᆨ 얼마나 이 말씀을 배울 때 율법에 갇힐 수 있는가? 우리가 이말씀을 통해서 도전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내기 믿는다 라는 것으로 얼마나 나 자신을 스스로 격리해 왔고 멀리해 왔는가?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은 없는가? 아닌 것 같지만 있죠. 하나님의 자비. 그리스도 사랑이 깃든 교회가 되어야 하죠. 복음적인 교회.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하죠.

기본적으로 격리된. 멀어진 소외된 자들에 대한 자비가 있느교회. 그런 관계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런 열려진 교회를 만들어 가야 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대변을 보면 그들이 증오합니다. 어찌 사랑을 보고 증오 할 수 있겠는가? 무엇 때문에 증오합니까? 법을 깨든 것, 율법주의 여기에 매여 있어서 사랑을 못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우리 신앙 속에 이런 논쟁이 따라다니죠. 우리는 믿는다 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의 빛을 가리는 적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8장을 보겠습니다.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8: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을 다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는 데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문둥병자입니다. 레위기13장에 기록되었습니다. 문둥병에 처음에 조금하게 나타나다가 온 몸으로 퍼지면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병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병은 전염이 되는 병이기에 유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수 없고 철저히 격리되어야 했던 병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서 사람이 듣고 가까이 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렇게 상대해서는 안되는 모세 율법에 의하면 철저히 격리되어서 따라 살아야 될 자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버림이 된자로 죽은자와 같이 된자입니다. 상대 할 수 없는 사람이입니다. 이 버림받은자. 저주 받은 것 같은 자 안에 구원의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간절히 갈망하는 그는 나아와서 절하고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이죠. 그의 신적 권위를 가진 것을 확신한 사람입니다. 그의 간구에서 알수 있습니다. 문둥병은 죄의 증표로 알았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문둥병을 고침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병자 안에 이런 깊은 신앙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기만 한다면 나을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습니다.

 

지금 절망속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자가 왔습니다. 우리는 환자의 모습도 봐야 되고 8장을 읽을 때 그리스도의 그 안에 있는 자비를 봐야 됩니다. 그것을 버리고 내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5장부터 7장 까지 산상 수훈을 하시고 천국 의법을 가르치시고 참으로 아름 다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근사한 말씀과 은혜로 충만한데 그러나 마주한 현실은 어떤 것입니까? 가장 낮은 곳에 가장 비참한 자리에 서서 8장이 시작된다는 것 입니다. 율법의 시작에서 보아야 하죠 만나룻 없는 사람들. 만나서는 안되는 사람이라고, 율법을 통해서 사람을 본다는 것이 율법이냐? 하나님의 자비냐? 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문둥병자를 대하는 이 깊은 사랑을 우리가 이것을 깊이 깊이 묵상해야 됩니다.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그를 안 만나지 아니하시고 네가 갈곳이 있느니라 너는 내가 만날 자가 아니다 라고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절대 너는 손을 내밀지 말것이며, 접촉하지 말것이며, 만나지 말것이며, 성중에서 멀어질 것이며 혼자 살아야 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며 사신 분입니다.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주님의 겸손과 온유가 이러합니다. 상한 갈대 가느다란 상한 갈대 곧 쓰러질 것 같은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기름이다하여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것 뿐만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상한 것을 회복시키시고, 꺼져가는 심지에 자신을 내어주시며 더 활활 타오르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문둥 병자의 나음 입음과 같이 상한 갈대와 같은 자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들이 주님을 만나서 회복하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깨끗케 된자들 아닙니까? 먼저 주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구원자다 라는 정체성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고 다시산 생명을 얻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부르심의 소명이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깊은 세계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 그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마음. 이 마음을 담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 하되 어디 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12: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모든 사람 곧 영적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이방에 생명의 빛.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구원의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열방이 만국이 생명의 축복을 인하여 기뻐하는 그날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할례자를 전도하고 사도 바울을 이방을 향하여 가장 열열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부르심을 따라 그 소명을 따라, 보내심을 입은 자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며 생명을 구원하는 저와 여러분 다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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