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ang Church

제목: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본문: 1:3-6

설교: 정희숙 목사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의 삶이라는 것,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해야 가치로울까? 가치있는 인생이 될까? 많이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존재 하는 이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존재의 목적이 무엇일까? 존재는 존재의 목적과 같을 때 가치로운 인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목적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돈을 많이 벌고 즐겁게 사는 것일까요?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한 말이 있죠. 15살은 학문에 뜯었다하여 지학이라하고, 30살에 모든 기초을 세우는 아이다하여 이립이라하고, 40은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 하여 볼혹이라고 50에는 천명을 아는 나이다 하여 지천명이라고 합니다. 60에는 인생에 경륜이 싸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나이라 하여 이순이라합니다. 그러니 시대마다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로운지. 그 물음을 가지고 논하지 않습니까? 공자는 50이 되어서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 하늘의 뜻을 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인생 존재 목적은 창조 목적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목적이 무엇 이었는가 입니다. 우리가 흔히 의자를 만들 때 앉기 위해서 만듭니다. 의자를 만든 목적 대로 쓰일 때 가장 가치로운 것이죠. 존재 목적은 창조 목적에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알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 되었는지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민하고 방황합니다. 그 비극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서부터 시작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죠.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세상이 하나님이 원하지 않고 인간도 원하지 않는 세상이 되고, 이 세상이 죄악으로 물든 타락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우주적인 타락은 왜 일어났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근본적이고도 핵심적인 물음, 우주적인 타락은 왜 일어났는가? 자신 안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알고 세상과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 인간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었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므로 죄에 빠지고, 인간이 아들의 자리에서 떠남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잃어버리므로 세상에 죄가 오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상, 타락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 타락한 세상은 그대로 지속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이 세상을 회복시키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때 하나님의 한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비리게 되는 아픔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께 돌아갈 길도 모르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십자가를 통해 확증하셨습니다.

 

요한복음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 곧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구원을 얻는 모든 자에게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구원 받은 자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잇습니다.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결론이 나 있습니다.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값없이 베푸신 은혜 우리는 찬송하는 마땅한것입니다.

신령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죄사함과 구원. 부활과 영생,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받아 누리게 되는 신비하고 거룩한 축복을 신령한 복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고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죽음에서 건지시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생애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온 인류가 예수그리그도를 믿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죽음 너머의 영원한 세계를 보게 하시고 참 소망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에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가 누리는 놀라운 축복이 신령한 축복입니다.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 안에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에 감격과 감사의 찬송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가 찬송이 되나요? 그리스도 교회 안에 있는 찬송이 강렬하죠. 깨달음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찬송이 울려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은혜 중에 큰 은혜 신령한 복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편지를 쓴 사람 바울 사도를 보면 어떻습니까? 자신을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나는 괴수중에 괴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잔멸하새. 성도를 흩었던 원수 였죠. 그런 자를 택하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 은혜의 깊이를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죠. 그는 말하죠.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부터 택하셨다고 예지 예정하신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의 손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구원의 섭리를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고, 선택한 그리스도인을 거룩하게 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벧전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벧전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1: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던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좇아 사욕을 방종한 생활을 버리고, 어둠에서 광명한 빛으로 부르셨으며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너희는 거룩한 존재이니 그 거룩함을 나타내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살도록 한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아가도록 그들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복음 안에서 산다할 지라도 율법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완성한 사랑의 원리를 따라 윤리적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거룩을 따라 거룩해져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뜻를 좇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죠. 부족하고 약하고, 능력도 없고, 잘 하는 것이 없어서 좌절이 밀려오고, 왜 이런 나를 택하셨을까? 를 반복하면서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봐도 성격이 즉각적이죠 요한은 그를 우레와 같다고, 우레의아들이라고 할 정도의 별명이 있죠. 바울은 어떻습니까? 고약하고 지독하죠. 그러나 그런 성격이 복음을 전하는데 지독하게 전하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다듬어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작은 것 까지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분, 그분의 통치과 섭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 염려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가 달라지고 작년 보다 올해가 다르고 내년은 더 나은 모습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그 근사하게 변화되어서 더 거룩한 모습으로 새로워져 갈것입니다.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로마서 8장에서 미리 아시고 정하시고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현대인들 안에 깊은 불안이 있는데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자기 힘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정이란 어떤 예정이냐면 최종적으로 정말 아름답고 선한 미래로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손길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결코 불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리막길로 내려갈 때 좌절이나 절망이 올 때 결국에는 더 크게 치고 올라가기 위함이란 것을 이 믿음을 통해서 알기 때문에 이것은 곧 지나가리라는 것을 믿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예정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것만 예정하시고 영화로운 미래로 인도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를 미리 아신 것은 예지이고 나를 미리 정하신 것은 예정입니다. 바울은 여기 예지예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나에게 임했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복음이 들려질 때, 모든 사람이 다 듣고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8장에 사도가 불신앙의 신비를 말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불신앙의 신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졌으니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베풀어주신 선행적 은총이 있었음을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그 선행적 은총이 바로 예지예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신 거라고 지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불러 내셨는데, 그것이 단지 구원에 이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간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확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의 뜻을 따라서 나를 미리 아시고 나를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도 안에 있는 예지예정론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예정의 목적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가 뭡니까? 첫째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주께서 그의 삶을 다 승리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살아야 하는 것이죠.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부르신 이를 의롭다 하신다고 했습니다. 내가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지와 예정과 부르심과 의롭다하심과 영화롭다하심입니다. 구원은 이런 단계를 거칩니다. 크게 보면 칭의와 성화와 영화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영화의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잘못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다른 길로 갈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길을 간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것이 선이 되게 하십니다.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정하시고 부르신 그 길을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적지를 정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종국은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영광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안에 있는 확신입니다.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이 사도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용기를 얻고 힘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사도는 여전히 오늘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사도의 말은 우리 영혼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격려와 위로가 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사도의 절대 예지 예정의 신앙을 따라 사는 우리는 구원의 감격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에게 거저 주신 그 은혜, 값없이 베푸신 그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이 예정의 신앙을 가지고 위대한 역사를 열어낸 것입니다. 우리도 예정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우리의 존재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은헤 거저 주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며 그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른 우리가 구원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바울이 그러한 것 같이 이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과 함께 하나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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