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
본문: 롬1: 19-20
설교: 정희숙 목사
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존재하십니까? 그리고 존재하신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이며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하나님을 믿을 때 비로소 인간의 근본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그 길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시14:1) 그러나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하나님은 존재하실 뿐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데서 부터 신앙은 시작됩니다. 이 믿음이 없는 자들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고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기록된 것이며, 많은 신앙인들은 인격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도 있지만, 인간은 이성의 능력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일 뿐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에 대해서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깨달음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 뿐 아니라, 그 분을 온전히 알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살펴보고 하나님을 알고 믿어서 큰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주관적으로보아도 객관적으로 보아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세상은 객관적인 세계이고,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매우 질성정연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가지고 우리가 세상을 보는데. 이 세상이 다 조화롭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질서와 신비로운 기초를 놓은 분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비로 하나님이십니다. 창조물이 있다면 창조주가 반드시 있는 것이 상식적이죠. 이 창조주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선언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고 이 세계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철학에서 신 존재 증명 방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존재론적 증명방법과 우주론적 증명 방법이 있습니다. 존재론적인 증명 방법은 인간이 내면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으므로 인간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우주를 코스모스(Cosmos)라고 했는데 코스모스라는 말은 원래 질서라는 뜻입니다. 우주는 너무나 정교한 질서라는 것입니다. 우주가 매우 정교해서 사람들은 우주를 시계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정교하고 질서적인 우주가 우연히 조합되어 나타났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인간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19:1-4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 시편 기자의 시를 보십시오. 창조의 세계를 보면서 날과 밤이 하나님의 지식을 전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나무와 물과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이 인간의 말과 소리가 아닌 또 다른 소리로 이 지식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할 수 없는 것들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가 무궁하도다! 깊고도 깊도다! 오묘하시도다! 신비하시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우주를 지었을 뿐 아니라,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우주를 창조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우주는 코스모스, 질서라는 뜻인데, 설계자가 없이는 이렇게 질서정연한 세계가 만들어질 수 없으며, 이 설계자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헬라인들은 이 질서, 영원한 진리(Universal Logos)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지식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바로 헬라인들, 그리고 오늘날의 사람들이 찾는 영원한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진리의 본질은 사랑(Agape)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삶과 인격으로 성취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진리의 실체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길이요 진리라고 하셨습니다.(요4:16) 이것은 예수님의 존재가 진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0절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핑계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천지 만물을 바라보며 이성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연신교
데이즘(Deism)이라고 하는 자연신교는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신학 사상으로 계시를 이성과 대치시키고, 종교를 도덕으로 대치해 이성으로 종교의 근본을 알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신학사조입니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에 의한 창조는 믿지만 섭리는 부정합니다. 창조주가 창조한 자연에는 자연법이 있으며, 자연은 신의 완전한 창조이므로 특별계시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통해서도 충분히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신교의 하나님은 시계공과 같은 하나님입니다.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면 이후에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물은 창조후 스스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뿐만이 아니라 창조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를 그가 보존하고 계심을 알려주는 섭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고 하셨습니다. 한 앗사리온은 지극히 작은 단위의 화폐인데. 참새 한 마리를 가격을 매길수 없어서 두 마리여야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참새 한 마리. 가치가 없는 작은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가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우주 만물의 모든 것에 이르기 까지 다 하나님의 섭리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의 신앙과 함께 섭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실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구원 역사를 펼쳐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의 음성이 있습니다.
시42: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의 기자는 사슴이 갈증을 느끼면 반드시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혼의 음성에 깊이 관심을 기울여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영혼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죄로 인해 마음이 어두워져 있고 깊이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고백론에서 “당신(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만드셨기에 당신 안에서 쉼을 찾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라고 말했고, 터툴리안은 “인간은 날 때부터 크리스천”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실존적 신 증명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입니다. 인간이 날 때부터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세상에서 고유의 종교와 철학, 문화 아래 있던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온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해와 해바라기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인간의 관계성입니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의존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존 자체의 하나님을 찾는 음성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장마로 인해 폭우가 내려 급류에 휘말렸습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급히 물에 뛰어들어 그 사람을 순식간에 건져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졌던 그 사람은 급류에 휘말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찰나와 같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이 다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한 것, 잘한 것이 모두 영화의 필름처럼 지나가면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제가 살아나기만 한다면 회개하고 새 삶을 살겠습니다. 제 삶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신비한 영적인 체험을 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해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매우 탁월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라는 말 속에 이미 아들이 있는 것이고, 아들이라는 말 속에 이미 아버지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이미 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고, 아들이라는 말은 이미 아버지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고 있고, 아들도 아버지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은 이미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부르고 있고, 인간은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바울은 로마서 1장 21절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영혼의 진정한 욕구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락하고 거짓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불안과 고독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빈 자리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깊어져만 갑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크리스천이며,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나님을 부르고 있고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를 보면 하나님께서 지은 거 알 수 있고 우리가 핑계할 수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요? 전 모릅니다.”라고 할 때, 바울은 “이 세계가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걸 보고 우연이라고 하느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아도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다고 대답하는 사람에게 바울은 19절에 “네 안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있다. 양심의 가책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새로운 감탄과 경외감을 마음에 채워주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 위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요 다른 하나는 내 속의 도덕률(양심)이다.
인간 안에 양심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선험적인 지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하게 하려는 부패 하고 거짓된 이성의 간교에 우리가 절대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우리에게 이미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사고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어머니를 발견하면 다 그 품에 자기 자식을 껴안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 밑에서 아기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난 거기에 제목을 “생명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이다”라고 적고 싶었습니다. 생명보다 더 강한 것이 사랑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철학에서도 말하는 인간 안에 있는 선험적인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하기 이전의 것입니다. 이런 선험적인 것을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 안에 있었는데 나는 주를 밖에서 찾았나이다”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요청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분명한 선험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험적인 지식이 여러 자연 만물을 보면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더욱더 정교해지고 깊어지고 견고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먼 곳을 돌아다니지 말고,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 정직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성이나 과학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곡되고 거짓된 이성과 양심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우리의 이성과 양심을 흐리고 미혹하는 사단의 존재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위기에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이고 한계적인 상황에 부딛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살려주세요."라고 외치게 됩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타락하고 거짓된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순수한 영혼이 먼저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분이 어떤 분인가? 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성경과 그리스도예수입니다.
성경과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온전한 계시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특수계시를 기록된 문서로 남긴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한 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경을 공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방식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쳐주는 뜻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며, 성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고, 그 육신의 얼굴을 보려고 하는 자들에게 숨어계시는 분이십니다.(사45:15) 성서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며,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청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긴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롬10:17) 하나님의 선지자와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 영혼에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통해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믿음 없이, 믿음을 떠나서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성을 통해서, 철학적이고 분석적인 작업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분석하고 분해하려는 일체의 교만한 시도들을 내려놓고 무릎 꿇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신비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을 때 분명히, 그러나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또한 거룩하게 구별하신 선지자의 입을 통해 증거되는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일체의 교만을 내려두고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이성이 아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계시인 성경을 듣는 행위를 통해서 “믿음”의 창이 열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성부는 성자를 통해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하나님)를 보았다”(요14: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다면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외모로 인한 것이 아니었고, 그분의 말씀과 삶(사역)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요14:10)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외모를 알고 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체험이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대화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하나님을 이 땅에서 드러내고 행하고자 하셨던 감추어진 세계들을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태초부터 있었던 영원한 진리,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요일1:1)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1:14), 진리가 온전히 인격과 삶을 통해서 실현되셨던 분이셨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진리였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는 자마다 하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만난 자마다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가장 온전한 계시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위대한 사랑, 즉 위대한 용서와 대속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셨던 그 주님의 모습은, 바로 거짓된 인간들에 의해서 고난당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확실히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하고 온전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유추된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통해 우리 가운데 계시된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죠,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더욱더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우리가 들은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라“ 고 고백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다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