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방인의 죄(내가 왜 죄인인가)
본문: 롬1:18-32
설교: 정희숙 목사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무엇으로 부터의 구원입니까? 그것은 죄에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말할 때 구원은 타락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고, 죄인이 아니라면 구원이 필요없는 것이고, 따라서 구원자. 즉 예수그리스도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병들지 않았다면 병의 고침을 받을 필요가 없고 따라서 의사가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떼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는 것처럼 죄인임을 부정하는 자,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의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죄에 대하여 깊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간절히 구원을 갈망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죄는 한자로 罪인데, 이것은 그물망(罒)과 찢을 비(非)가 결합된 말입니다. 죄는 그물을 찢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그물은 법, 즉 천국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거역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너무도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그 아름다운 모든 세계를 아담에게 주시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관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어기고 불순종함으로 결국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감사가 사라질 때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를 짓게 되고 그로 인해서 파생되는 인간의 죄적 실존을 보고, 내가 왜 죄인인가? 라는 물음에 해답을 얻어서 죄를 알고 구원에 이르는 귀한 시간이 되기원합니다.
우리 안에 죄를 지적하는 것은 그의 인격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을 강조함으로 영혼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환자가 병원에 오면 의사는 진찰를 통해서 그의 병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 당연한 것과 같이 죄를 보는 것은 그가 가진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며 자신의 죄를 분명히 깨닫고 구원의 문으로 나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죄로부터 치유을 받고 회복되고 죄에서 구원 받은 자유한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 받아 자유함을 얻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자신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전에 죄를 지으며 멸망을 향해서 살아갔던 삶을 돌이켜 생명의 길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죄를 짓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온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다만 회개치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발견될 때 잘 부서지고 깨어지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며 회개하는 것, 하나님은 그 모습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게서 진노하실 수 밖에 없는 죄가 있다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니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바울은 로마서의 본론을 "하나님의 진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8~21절은 죄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면서 진노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사도 바울은 율법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이렇게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아주 체계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도가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왜 우리를 향해서 분노하시는 지를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달콤한 말이나 단순한 구호로 포장해서 말하지 않고 시작부터 우리가 처해있는 심각한 영적 정황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진노의 결론은 지옥이요 영벌입니다. 인간은 지옥행 열차를 타고 숙명적으로 모두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 1:2-3). 이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이게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 헬라의 하나님과 다른 겁니다. 하나님은 무감정의 신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탄식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소도 주인을 아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자식이 부모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게 인간입니까? 짐승도 제 어미를 압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니, 진노를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1장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바울이 끄집어 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바울은 이방인들 안에 있는 죄의 핵심을 너무나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의 핵심이 불경건과 불의라고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불경건과 불의. 이것은 우리가 로마서 1장, 특히 로마서의 죄론을 공부하는 가운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단어입니다.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이고, 불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입니다. 불경건은 수직적인 관계에서 짓는 죄라면, 불의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짓는 죄입니다. 우리는 먼저는 불경건의 죄에 대해서 깊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의 시작은 하나님을 믿기 싫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불경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채 불의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풀을 뽑는데 이파리만 뜯고 뿌리는 뽑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입을 틀어막는 자들이 있습니다. 왜 막습니까?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라고 말했습니다. 바울도 처음에 복음 전파자의 입을 틀어막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변하고 썩어지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입니다(사 40:8). 이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막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도 모르는데 왜 내가 죄인이냐?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대답입니다.
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너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심’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저 위에 있는 하늘이 있는 것처럼 내 마음에 도덕률(양심)이 있고,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 안에 양심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도덕적 감각이 있기에 인간은 종교적 존재입니다. 인간만이 무덤을 만듭니다. 이 의미는 인간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래된 무덤을 발견하면 그 안에 그들의 예배에 대한 것을 그려놓은 벽화도 발견됩니다. 이 양심은 교육이나 경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험적인 것입니다. 사고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어머니를 발견하면 다 그 품에 자기 자식을 껴안고 죽습니다. 생명보다 더 강한 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선험적인 것을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시편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과 같이,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고 있습니다.
또 20절에 바울은 여기에서 먼저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성’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딱 한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이었습니다. 로댕의 조각 중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유명한 조각품이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이 이성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고 지금도 인간이 누리고 있는 특권이 이성입니다.
바울은 “객관적으로 지어진 세계를 보라. 너희가 그것을 깊이 보면, 어떻게 이 세계를 지은 자가 없다고 부인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이 개인 안에서의 ‘나’에 대한 것이라면, 20절은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는 매우 주관적이고 후자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가지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십시오. 이 우주는 운행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합목적적이고 질서정연합니다. 이 조화로운 세계가 우연이겠습니까? 우연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창조물(Creation)이 있다면 창조주(Creator)가 반드시 있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습니까? 이 창조주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선언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입니다.
창조는 무엇입니까? 내적인 것을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외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미술학원 선생이 그러는데,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아이가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림 안에 다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보이는 만물에 다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만물에 분명히 보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주와 만물을 깊이 주목해보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바울은 우리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야만성에 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꼭 죽게 되면 그때 가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물이 없으면 그때 가서 물이 귀한 줄 알고 공기가 오염되면 그때 공기가 귀한 걸 아는 아주 못되고 사악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이게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시편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1,3-4). 우리가 무엇이관데 이 아름다운 세계를 주신 것입니까? 우리 안에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찬양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 150:6)” 이것이 인간이 사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둘째는 죄인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 더 크게 감사해야 합니다. 이 감사하는 신앙이 가장 높은 경지의 신앙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했습니다(살전 5:18). 그런데 인간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허망하여지고 우둔하게 되고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감사치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은 자들이 이제
롬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 했으나 하나님을 버리고, 그 자리를 다른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주의 중심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이것을 부인하고 거부하고 반역함으로 우둔하고 미련하게 되었고, 마음이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인간이 더욱더 우아하고 고상하게 살아갑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함(wicked)은 하나님을 버리고, 그 자리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거짓된 우상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영혼의 공허가 다른 우상으로,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은 항상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손바닥으로 가려질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혼 속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주를 찾기에 갈급한 것입니다.
인간이 어리석음을 그대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든 자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하나님처럼 우상화해서 섬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람, 돈, 권력, 정욕, 명예, 식물, 동물, 광물, 천체 등의 자연 만물 등을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1, 2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 20:3-4)"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대신 수많은 우상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계의 ‘죄’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십계명이 인간의 죄를 얼마나 정확히 관통하고 있습니까? 성서신앙의 훌륭함은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여지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질 때, 객관화되고 대상화 될 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이것은 매우 높은 가르침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고, 철저히 잘못된 우상에게 종속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윤리적인 몰락, 인간성의 상실을 가져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결코 대상화가 되실 수 없고, 언제나 하나님 자신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하나님께서 특정한 대상이나 이미지로 우상화되는 순간,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이해가 생길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인간 또한 왜곡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롬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바울은 25절에서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서 다시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26절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기”입니다. 선택과 유기의 문제는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바울은 본문에서 유기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유기가 일어납니까?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자신이 걸어가던 삶에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죄에 대해서 회개치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결국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내어버려 두사”라고 표현했습니다.
롬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이것이 이방인들의 죄의 현실입니다. 인간성의 상실와 윤리적인 몰락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영혼의 허전함을 느끼고 그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결국에는 더러운 욕망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나중에는 정욕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고상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간음을 행하고 동성애에 빠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서(유 1:6-7)와 로마서를 포함해 성경의 여러 곳에서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의 중심에 하나님이 사라질 때, 극심한 무질서가 자리하게 됩니다. 옳고 그름이라는 것의 판단 기준을 모두 상실해버린 모습이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극심한 혼돈이 생기고, 정욕에 빠져서 부패해가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왜 성적 타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운 아가페의 사랑, 즉 영적인 사랑을 모르는 자는 에로스의 사랑, 즉 육체적인 사랑에만 몰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성적 타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창조의 질서인데, 이것이 가려지고 깨지게 되면 극심한 성적인 타락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이런 총체적인 혼돈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로마만을 향한 바울의 분노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롬1:28-31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자라
바울은 28절에서 이방인들 안에 있는 아주 중요한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원인이요 뿌리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목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내어 버려두사’ 아니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왜 죄짓고 죄로 고통 받는 자들을 구원치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 하나님의 깊은 고통이 있습니다. 사랑이 클수록 더 멀어지는 세계. 더 품을수록 더 멀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심판은 진노가 아니라 내어버려 두는 것, 즉 유기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는 것을 잡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유기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기하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붙드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롬1: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죄를 짓는 것을 보고 죄 인지 알면서도 자기도 죄를 짓고 그 죄 짓는 것을 옳다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보지 못하고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져서 죄 속에서 죄와 함께 살다 죽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인 인간들에게 결국 "사형선고"가 내려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사형(Death)”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무겁게 들어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다음에 심판이 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가 죄를 지으며 살아가면, 하나님의 최종 심판대에서 우리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질 것입니다. 불타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인간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지옥입니다. 영원한 지옥이 기다립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 죽을 인간 가운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길과 진리와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목숨이 산다는 것입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하니하리니(요 11:26)”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고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길이 없고 오직 예수가 필요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복된 저와 여러분 다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