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ang Church

제목: 유대인의 죄

본문: 2:1-11

설교: 정희숙 목사

 

 

지난 주에는 우리가 로마서 118절에 말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에 대하여 1장에서 이방인의 죄를 보았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죄,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하나님을 믿는 자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죄를 보는데 이는 믿는 자의 죄로 바꾸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법을 알고 지키며 살아간다고 하는 스스로 의인 이라고하는 자 안에 있는 죄를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자신들이 큰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선민은 한 명도 심판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무리 심각한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이 지옥의 문에 기다리면서 그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과연 그러한 것이냐? 너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의롭게 살면서 스스로를 의롭다 하면 불경건성이 됩니까?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면 이게 잘못된 것입니까? 라고 반문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초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려는 초점은 죄악의 그늘 아래 있는 자나 구원을 받은 자나 하나님 없이는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을 향해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항상 남을 구하고 자신이 버림을 받거나(고전 9:27)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늘 이 두려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분노와 경고는 유대인들이 자기의 의로 스스로 설 수 있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지 않고는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제일 첫 번째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로마서 2장은 유대인들을 향한 진노입니다. "너희 유대인들은 어떠하냐? 너희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먼저 다른 이를 판단하는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6-37절을 보겠습니다.

[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이방인이라는 말을 불신자, 유대인이라는 말을 기독교인이라고 바꾸어서 말씀을 보면 그 의미가 깊이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라고 하는 너희들은 나는 구원받았고 이방인은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며 남을 함부로 비판하는 데, 진정 그러하냐? 보자

누가복음 18:9-14절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 보면 바리새인 안에 감사가 있는데 어떤 감사냐면, 내가 이방인과 같지 않고 세리와도 같지 않음에 감사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는 내가 할 도리를 다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교만입니다. 그가 했던 금식과 십일조가 경건한 사람의 표상입니까? 그것이 진정 주께서 보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을 보겠습니다. “[21:31 개역한글] 세리나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느니라.” / “[19:30; 20:16; 10:31; 13: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창기는 사랑으로 더럽혀진 자이고 세리는 돈으로 더럽혀진 자입니다. 이들이 경건했다는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혁명적이고 충격적인 말입니다.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리새인은 경건한 모양을 가졌지만 불경건했습니다. 반대로 세리 안에서 불경건한 자 안에 있는 경건성을 발견합니다.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 안에 나의 죄와 연약함을 시인하고 구원과 주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겸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온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의 자비로 인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이유입니다.

 

믿는 자들의 문제는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선을 그어놓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너희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항상 3가지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제목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그들의 감사가 물론 옳은 것이지만, 이것을 잘못 해석하고 도를 넘어서게 되면 이방인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형제를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울은 너희도 같이 판단을 받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먼저 믿는자는 자신에게 임한 구원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라는 것이지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무시하고, 그것을 차별의 도구로 이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들 안에 가장 잘못된 문제는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선민들은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된 자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해 죽어가는 형제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길을 막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먼저 부름 받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우리가 잘못해도 심판하지 않고 오래 참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아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셨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겠구나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니까, 내가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할 때, 신앙의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사악한 모습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신앙의 허위(虛僞)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바울은 믿는 자들이 악이용하는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하나님의 인자하심’, 둘째로는 하나님의 용납하심’, 셋째로는 참으심’, 넷째로는 풍성함입니다. 믿는 자들이 이 네 가지를 이용합니다. 이방인의 불경건성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이라면, 믿는 자 안에 있는 불경건성은 이런 하나님의 자비를 악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죄를 은폐합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나는 언제나 빠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결코 나를 망하게 하지 않고 구원하시리라고 착각합니다. 이방인에게는 적어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안에 이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묘하게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이용하여 죄를 반복해서 짓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인들 안에 있는 이런 어두운 면을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의 양면을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거룩이 없는 사랑이나 심판이 없는 구원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사도의 음성 안에 이 양면을 다 보게 하려는 지극하고도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진노의 하나님을 알아야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진노아래 있어야 하는 나인데.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나인데.’ 라는 인식을 갖고, 그런 내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가 결국 증거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는다 하지만 이런 간교한 믿음이 내 안에 있고,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이용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붙들고 가시는 것이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우리가 결코 주의 자비를 이용하거나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은혜를 악이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그것에 대해서 회개치 않고 고집을 부리는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 대해서 들을 때, 그것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죄를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삶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신앙인들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용해 죄의 낙을 누리려 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기보다 어떻게 하던지 나는 구원을 얻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거짓된 유대인들의 모습을 지적하며, 그런 자는 결국 진노의 날을 맞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2:9-1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행위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을 바울은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알아야 하지만,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만 배우고 강조하게 되면 신앙의 해이hazard가 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과 진노의 하나님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와 신앙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중요한 만큼 행위가 중요합니다. 믿음만 강조하고 행위를 약화시킨다던지, 행위를 강조하면서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이 두 면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균형 잡힌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외모라는 것은 혈통이나 족보, 의식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통해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과 삶을 주목하십니다. 종교적 행위나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족보와 혈통, 할례를 강조했고, 이것을 통해서 구원이 임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을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안에 있는 잘못된 특권의식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며, 누구도 자신의 외모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할 자가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외모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 우리의 신앙이 크게 빗나가게 됩니다.

 

양심의 심판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유대인을 향하여 죄를 지적하고 있을 때, 이방인들이 고개를 들고 신앙인들도 저렇게 책망을 받으니 내가 안 믿기를 잘했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이방인을 향해서 다시 말합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율법이 없는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모두 찔림을 받습니다.

 

죄형법정주의가 있습니다. 죄가 죄로 확정되기 위해서는 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방인들이 자신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이 죄를 지어도 죄를 죄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7절부터 32절은 어둠으로 가득한 이방인들의 죄, 그 참혹한 죄의 모습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죄를 지적할 때, 이방인들은 그것은 너희들이 정한 율법을 범한 죄가 아니냐? 우리는 법이 없으니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바울은 네 안에 선악을 분별할 지식이 없느냐? 네 안에 양심이 없느냐? 율법이 없는 자는 그것으로 심판을 받는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14-15절의 내용입니다.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에 따라서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면 율법이 없을지라도 그들 자신이, 그 양심이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 내 양심이 심판을 한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모른다고 하지만 양심이 있습니다. 율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의 법을 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알지 못해도 율법을 범하면 자기 양심이 변호사와 검사가 되어 때로는 송사하고 고발하고, 변호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들을 나타냅니다. 바울이 너무나 정확하게 인간의 죄성을 깊이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대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이방인들은 이방인대로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이것이 거짓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특히 신앙인들 안에 신앙을 이용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철저히 신앙을 이용합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잘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배에 나옵니다.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가림막으로 사용합니다. 물론 주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마음의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포함한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더 온전히 알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17-20]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21-22]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2:23-24]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열심히 신앙의 길을 가던 사람이 갑자기 이상해진다면 대부분의 경우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사랑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한 면으로 보면 매우 아름답지만, 다른 한 면에서는 지극히 더럽습니다. 신앙에서 눈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단은 눈부터 공격해 들어옵니다. 눈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여러 가지 유혹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항상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범하지 말고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한다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지만, 자신이 먼저 시험에 들고 유혹에 빠집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믿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깊이 있게 듣고 깊이 묵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자랑하고, 말씀을 자랑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음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는 바울의 지적을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가 가장 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거룩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많은 이들이 거짓되게 살아감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모독을 받습니다. 이방인의 하나님을 향한 모독이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믿는 자들이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부패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2:25-27]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바울은 할례와 율법의 행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을 범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교회를 다니며 세례를 받고 교회에서 봉사한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고 합니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말 깊이 묵상해야 할 주제이며, 도전적인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또한 이방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면 어떻게 하겠느냐? 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무할례자가 율법이 명하는 것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무할례자를 할례자와 같이 여겨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서도 지키지 않는 할례자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 안에 있는 잘못된 선민주의와 특권의식을 철저하게 부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이방인 가운데서 너희보다 더 경건한 자가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도전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지만, 율법을 범한다면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가 받은 세례가 유익한 것이지만,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세례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이 도전적인 바울의 메시지 앞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우리가 종교적 의식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대로 온전히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율법을 범하는 할례자를 판단할 것이라고 합니다. 무할례자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것으로 할례자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서 자신의 신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신앙의 모습이 없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우리가 이면적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늬만, 표면만 유대인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면적 유대인, 그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자가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신앙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방인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유대인인척 하지만 실제로는 이방인입니다. 신앙의 의식과 혈통, 족보 등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한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면 모두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잘났다고 인정하고, 의롭다고 해서 진정 의롭게 되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너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끼리만 칭찬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가 나옵니다.(29:35, 49:8) 유다의 본래의 뜻은 칭찬이라는 뜻입니다. 이 유다로부터 유다지파가 나왔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나중에는 유대 민족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칭찬이 진정한 칭찬입니다. 인간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칭찬만 바라보며 표면을 그럴듯한 유대인의 모습으로 포장했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이면을 보시는 분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칭찬이 아니라 진노를 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 또한 겉으로 보기에만 유대인 같은 신앙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과 중심이 변화되는 신앙인으로, 진정한 영적인 유대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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