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초대 공동체적 교회의 삶
본문: 행242-47
설교: 정희숙 목사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예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주권(=다스림)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예정하셨습니다. 그의 정하신 뜻에 따라,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예언자를 보내시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선민 뿐만이 아니라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온 백성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참혹하고 비참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의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는 일을 행하시는 주권이 있습니다. 이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는 주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섭리, Providence(프로비던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정해진 뜻에 의해서 이끌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무엇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에 대한 예정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주권)과 예정은 우리를 향한 사랑이고, 이 사랑은 끝이 없고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자이시니 인간을 향하신 그 사랑도 영원하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그 뜻도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과 다스림은 절대로 좌절되거나 실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승리인 것입니다. 이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철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 주권적인 행위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의 역사는 좌절될 수 없는 것이고 실패할 수 없는 것이고 멈추어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활을 역사적으로 보여주시므로,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를 증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절로 인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할 때, 그들에게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처럼, 성령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서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것이며.(행2:17-18)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이 예언대로, 신분의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이 땅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에 힘입어서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가 오고 난 다음에 생겨나게 된 것이 교회입니다.
2장에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이 회개를 하고 부활신앙을 확실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믿음 중의 믿음은 부활신앙입니다. 이들이 부활신앙을 가지게 되니까, 그다음에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성령을 받게 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들이 새롭게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롭게 변화된 백성, 즉 새백성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처음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처음 교회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것을 누가는 아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2장 42절부터 보겠습니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교회는 처음에 무엇을 했냐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가르침은 굉장히 깊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간단하게 말씀을 듣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율법과 예언은 다 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알자면, 우리가 율법과 예언을 다 알아야 합니다. 이것들을 알아야 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들이 주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변화된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임한 능력과 자기 안에 찾아온 새로움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더 깊게 되새김질했던 것입니다.
소는 위가 여러 개라서 낮에 먹었던 짚들을 밤에 다시 끄집어내서 되새김질을 합니다. 우리도 하늘 소가 되어서 공부한 말씀을 다시 잘 묵상하고 다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기이한 법을 우리가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임한 이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우리가 늘 성경과 말씀을 가깝게 하고 살아야 합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란 신구약 전체와 모든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다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일까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우리를 사랑하심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그리고 승천하심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총체적인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교회의 3대 요소(기능)는 첫번째로는 말씀선포(Kerygma)가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서 교사가 말씀을 풀어 먹이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 안에 은혜가 오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Grace & Peace (은혜와 평강)입니다. 말씀은 은혜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분의 말씀도 사랑입니다. 여러분들, 이 사랑을 조금 느끼게 됐습니까? 사실, 사랑을 느끼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사랑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노래도 다 사랑을 노래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좀 구별해 보려고, 헬라어로는 이 사랑을 아가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누가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것이 나에게 다가 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않습니까? 이 사랑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오면, 우리 안에 평안이 오고 우리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있게 되고 그것을 노래(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되냐면, 서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서로 교제하고.” 그리하여 서로 교제를 합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onia)’라고 합니다. 자동적으로 교제가 일어납니다. 고립된 인생이 된다든지, 단절된 삶을 살아가지 아니하고 서로 자꾸 나누려고 하고 교제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떡을 떼며.” 그러면서 함께 떡을 뗐습니다. 떡을 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전에 우리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대한 묵상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날 저녁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서 빵을 뗐습니다. 아버지가 빵 덩어리를 찢어서 한 조각씩 가족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가족이 한 몸인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 가던 중에 예수님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떡의 찢어짐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교제할 때, 꼭 공동식사가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은 영적 가족입니다. 의식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같이 말씀 듣고 기쁨이 있으니까 서로 대화하고 나누고 사랑으로 교제하고,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 다음에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먹고 기도합니다. 이들은 떡을 떼며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처음 교회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열심을 다 했습니다.
행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초대교회는 사람마다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다락방에 있었던 두려움이 아닙니다. 처음에 그들이 다락방에 모일 때는, 언제 추적을 받을 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부활신앙을 확증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죽어도 산다는 부활신앙이 충만해져서, 모든 두려움이 다 없어졌습니다. 영생의 확신이 그들 가운데 충만했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진짜 믿음 중의 믿음은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살아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영원히 철폐되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성령이 우리를 그렇게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성령의 사람이 되면, 능력도 받게 되기에, 그 어떤 두려움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마다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이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압도적인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표증입니다. 종교성이란 무엇입니까? 압도적인 두려움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초월적인 능력을 경험하면 느끼는 것이 놀라운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것을 경험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전도서의 기자가 이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너희는 땅에 있으니 말을 적게 하고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압도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를 다스리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단순히 두려움이었다면, 여기서의 두려움이란 아바 아버지이신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그 엄청난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우러러 보고 삽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이런 기준을 잃어버리고 살게 될 때, 모든 지혜를 잃게 됩니다. 반면, 이 자리로 돌아오게 되면, 우리는 지혜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서로 두려워했습니다. 이 말은 서로에게 피해를 줄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람도 두려워 합니다. 이것은 공포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경외하고 존중하고 존경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그들의 가슴 속에 들어와 있으니까, 그들은 그런 모양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교회였던 처음교회는 이렇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적인 교회였습니다. 모이기에 힘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함께 있었습니다. 결속력이 이렇게 강했습니다. 이것이 처음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말입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말입니다. 사람이 철폐하기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냐면, 소유입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무엇입니까?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그 무엇보다 강한 것이 탐심입니다. 갖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사람이 99섬을 가지고 있을 때, 한 섬을 더 갖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것이 소유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도의 제 1번이 무엇입니까? 소유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가복음 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소유로부터 자유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본래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충실한 것이 아니고, 더 많이 소유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삽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을 파괴합니다. 소유욕이 인간의 삶을 옥죄이고 인간의 삶을 가두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 변화된 사람들, 성령의 능력 아래 있는 변화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소유를 극복하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이것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에 힘 입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 영혼의 만족과 평화와 충만이 있으면, 비울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케노시스(Kenosis)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충만하고 부요하신 분이었지만,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주께는 신성의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헬라어로 충만은 Pleroma(플레로마)라고 합니다. 주님은 충만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비우신 것입니다. 또한 비움으로 채워지신 분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금과 은이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유만이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우리도 옛날에 너 같았다. 그러나 바뀌어진 우리를 보라(Look at us).”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네 모습과 똑같았다. 운명에 맡겨서 우리가 살았었는데, 우리가 주님을 만나서 이렇게 삶이 변화되었다. 우리의 손을 보지 말라. 그 동전 한 닢을 보지 말라. 우리의 손을 잡아라.”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우니, 그가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이 우리 안에 다 있었습니다. 이 3장은 우리가 다 경험했던 바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았지만, 이제 우리가 변화가 되었습니다.
은혜를 경험하면, 이 갈릴리 어부가 변화된 것처럼 삶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모습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모여 사는 세계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런 자들은 돈에 유혹되지 않습니다. 소유때문에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소유는 악세사리입니다.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소유는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를 흔들거나 나를 유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통용했다고 했습니다.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는 것입니다. 소유가 철폐된 최초의 신기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멋진 신세계입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꿈꾸는 멋진 신세계입니다. 여기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나왔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사람이 만듭니다. 그렇다면, 누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훈련을 갖고 되지 않습니다. 훈련은 부분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는 있지만,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할례와 세례와의 차이와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여기는 재산과 소유를 팔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언제 팝니까? 내가 많이 가졌고, 저 사람이 적게 가졌기에, 내 것을 팔아서 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었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에게 나눠줌으로, 모두가 다 이렇게 균등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 가장 멋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교회의 모습이 실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다 극한 가난 속에서도 균등을 실천하였고, 그 베품과 나눔 속에서 모두가 다 부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 9: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시편 112: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재물을 흩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자의 의는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라고 그 영광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무엇을 합니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씁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1:14a]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유가 철폐되니까, 마음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집에서 떡을 떼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먹는 것이 계속 나옵니다. 성전이 있고 집이 있는데, 성전에서 모여서 하는 것이 있고, 또 집에 와서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전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고, 하우스 쳐치에서도 모여서 떡을 떼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 안에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삼는 것이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 함께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그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제하고 떡를 떼며 기도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죠. 교회 중심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말씀이 육신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사도를 통해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죠. 그리고 들은 말씀에 대한 은혜를 서로 나누면 은혜가 더 풍성해지죠. 우리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서로 나누는 떡떼임을 하죠. 그럴 때 그가 받는 은혜를 들으면서 큰 은혜가 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은혜가 더 풍성해지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따라 기도하면서 우리 영혼에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를 했습니다. 은혜와 평안이 오면, 감사와 찬양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워야 합니다. 또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을 체험하니 그들에게는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분출하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지않습니까?
사11: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우리가 교회에 모이기에 힘쓰고,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듣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의 교제를 하고 떡을 떼며, 기도함으로 더욱 거룩해져가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넘치는 은혜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는 놀라운 부흥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